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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델베르그는 Badenwuertemberg 주에서 5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 20만명 정도의
중소도시이지만 왼쪽에는 라인강이 흐르고 도시 가운데를 네카어강이 관통하며 전후로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저 있어
동양의 풍수지리학적으로도 매우 살기좋은 고장이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유럽 최초의 원시인류가 이곳에 거주했던 터가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일명 호모 하이델베르겐스
유적, 켄트족과 로마인들이 고대로부터 거주했고 이후에 프랑크부족이 통일했다.
12세기 중반 호헨슈타우펜 가문에서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는 이복동생 콘라드 공작에게 팔츠 지역을 할양해주었고
이것이 하이델베르그 도시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이곳에 성을 짓고 팔츠 일대를 통치하기 시작하지만 1200년대 초에 이르러
대가 끊기면서 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Bayern 통치자인 비텔스바흐 가문 루드비히 1세에게 팔츠 영토를 할양해 준다.
1300년대 중반에는 황제 카를 4세의 금인칙서 발표로 팔츠 군주는 선제후로 격상된다 즉 팔츠, 작센, 브란덴, 보헤미안,
마인츠 주교령, 쾰른 주교령 트리어 주교령 등이 선제후가 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이당시 발생한 구교회 대분열(Great Schism)은 하이델베르그에 대학교를 설립할 명분을 가져다 주었다.
교황 그레고리오 11세(Pope Gregory XI)가 아비농유수에서 로마로 돌아온 후 사망, 그 후 두 명의 교황이 선출되게 되었는데
즉 프랑스 추기경들에 의해 선출된 아비뇽 대립교황 클레멘스(Clemens) 7세와 로마 추기경에 의해 선출된 로마교황 우르반
6세가 그들이다.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들은 대부분 로마에 있는 후계자를 지지 했는데, 이는 파리에 있던 독일인 유학생과
교사들이 추방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루프레히트 1세는 이것을 독일내에서 대학을 설립할 명분으로 삼고 로마 교황청을 설득, 결국 대학교 설립을 위한
교황 우르반 6세의 승인칙서를 받게되었다.
교황 칙서에 따라 하이델베르그에 파리대학교를 모델로 삼아 철학, 신학, 법학, 의학의 4개 학부를 포함한 일반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1385년 10월 23일 선제후 루프레히트 1세 (1309~1390)가 하이델베르그에 독일내에서는 최초로 대학을 설립한다.
대학창립 직후 대학 직인과 총장 직인 두 개를 만들어 사용했다. 대학 직인에는 사도 베드로가 대학의 수호성인으로
새겨져 있다. 오늘날까지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직인과 로고로 쓰이고 있다.
총장 직인에는 팔츠가의 상징인 사자가 일어서서 펼쳐진 책을 들고 있는데 그 책에 라틴어로 ‘셈페르 아페르투스 semper apertus; 항상 열려 있는”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슬로건이 되었다.
예로, 1400년대 중반에는 이 대학교에서 현실주의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의 입장을 모두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슬로건처럼 모든 사상에대해 열려있는 학문의 전당역할을 자처한다.
1400년대 후반 이 대학총장이면서 주교였던 요한 폰 달베르크(Johann von Dalberg)는 스콜라 철학에서 인본주의적
문화로의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많은 인물들이 하이델베르그 대학을 인본주의 적인 대학으로 만드는데 기여하게 된다.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도 이곳 신학부 교수들과 자신의 종교개혁에대한 정당성을 변론하면서 논쟁했다.
1563년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신학부는 129개의 질문과 답변을 통해 칼뱅주의의 기본교리를 담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서(Heidelberg Catechism)를 펴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이제 모든 대륙으로부터 학자들의 관심을 이끌면서 문화적, 학술적
중심지로 발달해 나갔고 독일 문화, 사상, 정치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학문의 전당이 되었다.
대학 캠퍼스내에 학생감옥이 유명한데 이당시 사법권이 학교당국에 있었으므로 무분별한 학생들을 가두어두고 처벌하는 일이 다반사였고 이는 19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마녀탑이라고 알려진 허물어진 탑이 교정 한 귀퉁이에 그대로 있다.
이 탑은 하이델베르그 시의 성곽에 있는 성탑으로서 중세시대에는 주로 감옥으로 사용되곤 했다.
마녀사냥이 행해지던 시대, 이 타워에서 실제로 마녀재판, 고문과 마녀 용의자를 수감하기도 했다.
1556년 오트 하인리히(Otto Heinrich, 1502~1559) 는 개신교를 승인하고 그 자신도 개신교 로 개종한다.
대학도 따라서 가톨릭계 대학에서 개신교대학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반세기 후에 종교전쟁이 벌어지는데 (1618∼1648) 이 기간에 구교의 침입을 받아 폐쇄와 개교를 반복했다.
특히1622년에 대학교 구교성당 (성령교회) 에서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의
팔츠 도서관(Bibliotheca Palatina) 을 약탈하여 빼앗은 서적들을 로마로 가져갔고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16세기 부터 반종교개혁의 물결도 거쌨는데 그 결과로 하이델베르크 대학교는 신교도적 성격을 차츰 잃고 예수회의 색깔을 띠게 되었다
즉 1735년에는 그 당시 도무스 빌헬미나(Domus Wilhelmina)라고 불리던 대학교 광장(University Square)에
올드 유니버시티(the Old University)가 건축되었고 여기에다 예수회의 예비신학대학(the Seminarium ad Carolum Borromæum)이 설립되었다.
17세기 후반에는 팔츠가 왕위계승전쟁(1688~1697) 으로 프랑스 루이 14세의 침략을 받아 1703년까지 대학교는 폐쇄되었다.
이 기간 학교는 거의 재개 불가능할 정도로 황폐화 되었다.
1803년 신성로마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모든 제국의 도시들과 주교령들은 큰 왕국, 공국에 흡수되게 되었고 이때
하이델베르그도 독일 남서부 지방의 바덴(Baden) 공국으로 복속되었다. 따라서 하이델베르그 대학도 바덴 대공
칼 프리드리히의 칙령에 의해 주립대학이 되었고 대공의 노력으로 학교는 다시 재자리를 찾게 되었다.
그는 교명도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설립자 루프레히트와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를 합해 루프레히트 카를스 대학 (Ruprecht-Karls Universität Heidelberg) 으로 개명하였다.
1900년 여학생이 처음으로 입학허가 받았고, 1924년 졸업생으로 미국대사 (여) 셔먼을 배출한다.그녀는 모금운동을 통해 새 켐퍼스 신축을 도왔다
1933년~1945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214명에 달하던 대학교수 가운데 반나치 성향이 있는 교수 59명이 추방되었고
이제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나치정권의 홍보대사 구실을 한다. 2차대전이 종료되고 하이델베르그에 미군사령부가 주둔할때
의학자 카알 바우어와 철학자 카알 야스퍼스의 제안으로 대학교는 다시 학문의 전당으로 돌아가게 된다.
삼페르 아페르투스 슬로건 대로 학문을 추구하기로 한다.
이처럼 하이델베르그 도시와 대학교도 파란만장한 역사의 풍랑속에서도 독일 최초의 대학교이자 독일 철학, 사상, 과학,
종교, 문학의 전당으로서 존립해 왔고 2010년 미국 시사주간지 (us뉴스&월드리포트) 는 세계대학의 랭킹을 발표했는데
하이델베르그 대학은 독일내 1위, 유럽내 14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가 말해주듯,
이 대학에서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는데 191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카를 슈피텔러 (Carl Friedrich Georg Spitteler, 1845~ 1924), 1963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카를 치글러(Karl Waldemar Ziegler, 1898~1973)가 대표적이다.
현재 재학생 가운데 약 20%, 박사학위 과정 등록생 가운데 약 1/3이 외국 유학생이다.